늦은 밤 기다리던 눈이 내리는데
방에서는 눈송이처럶 뒤척인다.
오래 전 세상을 뜨신 시아버지 생신이다.
내려놓지 못하신 한의 무게처럼
상엿길에 눈이 쏟아졌다.
이제 그 무게를 덜으셨을지
얹힌 눈에 허리가 휜 마른 풀은
아무 말이 없다.
해, 저 붉은 얼굴/ 이영춘
아이 하나 낳고 셋방을 살던 그 때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오르는데
출근하려고 막 골목길을 돌아나오는데
뒤에서 야야! 야야!
아버지 목소리 들린다
“저어---너--- 한 삼십만 원 없겠니?”
그 말 하려고 엊저녁에 딸네 집에 오신 아버지
밤새 만석 같은 이 말, 그 한 마디 뱉지 못해
하얗게 몸을 뒤척이시다가
해 뜨는 골목길에서 붉은 얼굴 감추시고
천형처럼 무거운 그 말 뱉으셨을 텐데
철부지 초년생, 그 딸
“아버지, 내가 뭔 돈이 있어요?!”
싹둑 무 토막 자르듯 그 한 마디 뱉고 돌아섰던
녹슨 철대문 앞 골목길,
가난한 골목길의 그 길이만큼 내가 뱉은 그 말
아버지 심장에 천 근 쇠못이 되었을 그 말
오래 오래 가슴속 붉은 강물로 살아
아버지 무덤 그 봉분까지 치닫고 있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뭉클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