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오늘 공원에서만 걸은 이유/
오늘도 그 시간에 나섰다.
정령들이 소곤거리는 것을 들으러 나가는 그 시간에 오늘도 나섰다.
걷기 시작하면 의례히 스마트 폰에서 들을 만한 것을 찾아서 듣기 시작한다.
오늘은 뭘 들을까 하다 단골인 또각또각 이야기 속으로의 문을 두드렸다.
새로 업로드된 것이 있다.
모파상의 단편이 올라와 있었다.
1875년에 발표한 그의 첫 단편집이라 한다.
그런데 제목이 으스스하다.
박제된 손, 이라는 데 왠지 섬 뜸했다.
모파상은 실제로 박제된 손을 보기도 했고 후에는 실제로 소유도 했어다는데
이 말을 들으며 소설을 들으려니 더욱 거시기했다.
길지 않아 좀 걷다 보니 다 듣고 다른걸 또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머릿속에는 모파상의 박제된 손에 대한 우중충한 줄거리들이 영상이 되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그렇다 보니 약간의 두려움 같은 것이 생기는 것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늘 가는 운동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돌렸다.
왠지 그곳은 어둑하고 음침하여 가고 싶지 않았다.
바로 옆 산에는 공동묘지만큼이나 묘지도 많다는 것을 지난봄에 올라가 봐서 알고 있는 터라 더욱 그러했다.
조용하고 한적하고 마치 숲의 정령들이 내려와서 놀다 갈 거 같은 그런 장소로 내가 자주 찾는 곳이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어디서 툭 튀어나올 것만 같다.
힘이 세고 손톱이 날카롭게 서있는 박제된 손이 매달아 놓은 문고리에서 툭 떨어져 시공을 넘어서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물론 그럴리는 없다.
왜냐 하면 박제된 손을 친구들 모임에 가지고 와서 보여주며 이야기를 했던 피에르가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힘센 손에 목이 졸려 환영을 보고 고통을 겪다 결국은 죽었는데 피에르의 장사를 지내는 과정에서 묘지를 파는데 생각지도 않은 관이 나오고 그 백골을 보니 손이 잘린 시신 인지라 그 시체 옆에다 잘린 손을 넣고 다시 묻었다고 한 거 같다.
그러니 그 손이 나올리는 없지만 그래도 오늘따라 음습하고 우중충할 거 같은 운동장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밝은 가로등이 줄지어 있는 공원과 공원 근처 도로는 두어 시간 걷고 들어 왔다.
요즘 이런 작품을 접하게 되면 너무 마음이 무거워진다.
죽고 사는 문제를 떠나서 왠지 우울하다.
한강 작가의 작품도 너무 무겁고 어두운 그림자가 많은 거 같아서 접하기가 쉽지 않다.
가능하면 밝은 작품을 좋아하는 나는 티브이를 틀어 보면 죽고 죽이는 쌈박질 영화에 너무 식상하게 느껴져서 안 보고 싶은데 안 봐도 틀어라도 놔야 하니 이건 웬 변덕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오늘은 소설 한 편 듣고 늘 잘 가던 운동장을 안 갔다는 생각을 하면 우습기도 하고 두려운 것이 별로 없다고 느끼는 나로서도 은근히 피하고 싶은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살아있다는 생명체의 자기 보호 본능이 작용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뭐 이런 걸 보고, 엉뚱한 이야기 같지만 살아 있네,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아도 될 성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