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읽기가 두렵다.
그의 작품에는 한, 아니 완성되지 못한 원성이나 두려움 혹은 억지로 삭이려 했던 트라우마 같은 것이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다 보니 뭔가 튀어나올 거 같기도 하고 기어이 내 안에 잠자고 있던 그것이 고기 잡겠다고 던진 낚시에 음흉한 쓰레기 같은 것이 끌려 나오는 것을 보고 느끼는 묘한 기분을 느낀다.
오늘 채식주의자를 또다시 들었다.
나의 독해력이 부족해서 그렇지 싶어서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 가서 또 들었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가 왜 채식을 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생각하니 온몸이 추위가 아닌 소설 속에 주인공이 느끼는 두려움이 전이하여 오는 듯하여 나의 몸은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억눌러 놓듯 한 그 기억이 틈을 노렸는지 스멀대며 기어오르는 것이 진액을 빨기 위해 나무를 기어오르는 개미처럼 그렇게 올라오고 있다.
수년 전 일이다.
남들은 경치가 좋다고 감탄하던 즐기던 장가계 나도 처음은 그랬다.
세상에 이런 절경이 있다니, 수없이 깎아지른듯한 봉우리들 저들 중 몇 개만 우리 동네 가져다 놓으면 좋겠네, 이런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 수많은 기암절벽의 봉우리들이 긴 시간에 걸쳐 바닷물에 깎이고 깎여서 생긴 것이란 것을 알고는 통증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남겨진 것들이 늑골이란 생각에 이르니 그 고통은 고스란히 내게로 옮겨왔다. 보기 좋다고 칭송하는 그 절경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들의 흔적이란 말인가
결국 나는 여행을 마치고 귀국해서도 그 고통으로 알아 누웠고 다시 일어서는데 여러 날이 걸렸다.
그 후로는 그 누가 장가계를 좋다고 하여도 나는 동의하지도 않았고 나 스스로 그곳을 예찬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그런 아픔을 그런 무거움을 나는 한강의 작품 속에서 느낀다.
그의 작품을 접하려면 아무래도 면역력을 더욱 키우거나 아니면 과거의 이러저러 한 기억들을 지워내고 읽어야 할거 같은데 묘한 것은 기억력이 좋지 않아 잘 잃어버려도 그의 작품을 접하다 보면 불행하지는 않았으나 결코 유복하지 못했던 과거의 기억은 유쾌하지 않게 고개를 들추고 나오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작품이 그런 면에서 인정을 받는 것인지 모르겠다.
재미를 떠나 소설 속에 주인공으로 각자의 과거에서 나를 데려다 분장하거나 바꿔치기를 할 수 있다거나 아니면 표현하지 못하고 있었던 미안함을 토로하게 한다거나 하는 힘이 있다.
어쩌면 우리 역사의 근대사를 꿰뚫어 가는 그런 용감한 정신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반성하게도 하는 그런 거, 그러나 아직도 인간을 살육하는 것이 횟집에서 회를 집에 입어 넣듯 그렇게 쉽게 생각하는 인간들이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