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일극체제가 붕괴되면 어떤 세계질서가 나타날까? 이제까지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가 붕괴되면 어떤 질서가 형성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크게 두가지 정도의 예측이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첫째는 지역별로 강대국들이 비교적 서로 유사한 영향력을 가진 다극체제의 형성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는 중국이 미국의 패권을 이어받아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고 지역별로 중간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국가들이 일극 및 다극체제의 양상을 동시에 지니는 형태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두개중 어떤 상황이 되던 한국은 생존과 발전이라는 점에서 지금의 미국 일극체제보다 나쁜 여건이 될 것이다. 이런 여건에서 살아남아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미래의 위협과 도전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과 북’은 각자 장점을 바탕으로 힘을 합쳐야 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전략을 구상할 것인가 고민의 첫단계로 예상되는 경우를 구체화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지역별로 강대국들이 중심이 된 다극체제가 형성되었을때의 상황을 예측해보자. 미국의 패권이 약화되면 다극체제가 형성될 것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대표적인 예측으로 보인다. 이런 다극체제라는 것은 미국과 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이런 체제가 형성된다면 이들 다극체제는 어떤 방식으로 작동을 하게 될까 ?
아마도 세력균형 체제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세력균형이란 자본주의 체제 국가들이 존재해온 방식이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19세기 유럽의 대표적인 외교술이었다. 5개 정도의 강대국들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해나가는 것이다. 세력균형에는 세력균형을 주도하는 국가와 세력균형의 대상이 되는 국가로 나뉜다.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가 세력균형을 주도하는 국가였다. 나머지 국가들은 세력균형의 대상이었다.
만일 미국 주도의 일극체제가 붕괴되고 다극체제가 형성되면 질서를 주도하는 국가들과 질서의 수립의 대상이 되는 국가로 나뉠 가능성이 높다. 한반도가 지금처럼 그대로 남아 있으면 질서수립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질서수립의 대상이 되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남에 의해서 내 운명이 결정된다. 우리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에 그런 운명을 겪었다.
두번째는 미국의 패권을 중국이 이어 받으면서 중국이 가장 강력한 패권을 수립하고 다른 국가들은 비교적 하위의 세력으로 형성된 1국 중심 및 다수의 중간 강대국세력이 존재하는 양상이다. 미국이 패권을 상실하더라도 중국이 미국의 패권적 지위를 그대로 이어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국은 미국이 내세웠던 정치적 이념과 이상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중국에게서 미국과 같은 자유주의적 이상주의적 가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중국은 더 이상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기도 적절하지 않다. 중국은 소련이 했던 것과 같은 민족해방이나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주장할 만한 정치적 자산이 없다. 지금의 중국은 청나라의 중국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냥 덩치 큰 강대국일 뿐이다.
러시아 및 인도를 위시한 여러 국가들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서로 이합집산하는 양상을 띨 것이다. 물론 이과정에서도 세력균형과 같은 강대국의 협잡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세력균형은 강대국의 언어다. 세력균형이란 말이 고상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세력균형을 주도하는 국가의 입장일 뿐이다. 세력균형의 대상이 되는 국가들은 강대국의 흥정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19세기말 대한제국이 대표적이었다.
미국 패권이 붕괴하고 나면 어떤 국제질서가 구축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반도는 지금보다 훨씬 불안정한 안보상황에 직면할 것이며 강대국의 흥정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남과 북이 분열되어 있는 상황은 강대국들이 이용하기에 너무나 좋은 조건이다.
이런 상황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남과 북이 장점과 강점을 바탕으로 서로 긴밀하게 협력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상황에서 통일을 논의하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다. 지금 당장 가능한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남북한은 통일이라는 민족지상명제를 달성하기에 앞서 가능한 협력의 수준을 먼저 높이는데 집중하는 것이 옳다.
한반도가 스스로 운명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려면 남북한이 서로 힘을 합쳐야 한다. 남한은 경제력, 북한은 군사력으로 서로 힘을 합쳐야 한다. 나는 이를 ‘남북 경제안보동맹’으로 칭하고자 한다. ‘남북 경제안보 동맹’이 수립되면 한반도는 강대국의 세력균형을 위한 흥정의 대상이 아니라 세력균형을 주도하는 국가가 될 수 있다.
남과 북이 그런 동맹과 같은 구도를 만들어 가지 못한다면 남과 북은 각각 각개격파 당하고 만다. 남한이 아무리 군사력을 강화시킨다고 해도 중국이나 러시아 및 일본앞에서는 새발에 피에 불과하다. 북한이 아무리 핵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경제가 빈약하면 러시아, 중국 및 일본에게 휘둘리게 된다. ‘남북 경제안보 동맹’은 다극적 국제실서에서 남북이 각개격파를 당하지 않기위한 최소한의 장치라고 하겠다.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가 붕괴되면 미국은 군대를 한국에 주둔시킬 이유가 없다. 이미 미국의 패권은 붕괴되고 있다. 그리고 붕괴된 패권은 다시 재건되지 않는다. 패권의 붕괴는 내부 모순의 결과인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미국 같은 거대한 국가에서 내부모순이 표면화되어 패권의 붕괴로 이어지는 상황이 되었을때 다시 내부모순이 해소되는 상황으로 복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패권을 상실한 미국이 굳이 이익도 없이 한반도에 주둔한 필요가 있을까 ? 냉전이 한참일때도 미국은 한반도에서 철군하고자 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극체제의 수립이후 ‘남북 경제안보 동맹’은 한반도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일전에 북한의 핵을 억제하기 위한 방안으로 ‘인문지리적 억제방안’을 제시한 적이 있다. 남한과 북한이 서로 동맹을 맺기 위해서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나는 ‘인문지리적 억제방안’이 ‘남북 경제안보 동맹’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라고 생각한다. 남한과 북한이 서로를 신뢰하기 위해서는 의도가 아니라 제도와 현실로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